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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의 B급칼럼] 일본의 양심은 살아있다

과일좀비 2019. 7. 15. 07:30


도쿄 소재 재일본한국YMCA의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는 2.8 독립선언을 이끈 한국 유학생들을 변호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전시물도 있다. 그는 일본인 최초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상자다. /뉴시스

아베 정권을 향한 분노, 평화를 향한 한일 연대로[더팩트ㅣ장우성 기자] 후세 다쓰지(1880~1953)는 한국 정부가 주는 건국훈장을 받은 최초의 일본인이다. 그는 메이지대 법대 재학 시절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식민지의 참상에 눈을 떴다. 변호사가 된 이후 2.8독립선언, 의열단 사건, 천황 암살을 계획한 이른바 '대역사건'을 비롯한 조선 독립운동가, 재일조선인의 변론에 나섰으며 조선 농민을 수탈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도 활약했다. 3.1운동을 두고 "조선 민족의 독립투쟁에 경의를 표한다"고 지지했고 간토대지진 당시 유언비어로 조선인 6000명이 학살 당하자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사과문을 투고하기도 했다. 조선인의 벗이 된 대가는 만만치 않아 3번을 투옥당하고 아들마저 옥사하는 고통을 겪었다. 1953년 암투병 끝에 눈을 감은 그를 향해 조선인들은 애도문에 "후세 선생은 우리 조선인에게 아버지, 맏형 같으며, 구원의 배와 같은 귀중한 존재였다"고 썼다.

한국 국가보안법의 모태가 된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본 내 양심 세력은 물론 조선의 독립운동을 궤멸시키기 위한 희대의 악법이었다. 1928년에는 최고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개악이 추진됐고 파시즘의 광기에 압도당한 제국의회에서 통과는 확실시됐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목숨을 걸고 치안유지법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의원이 야마모토 센지(1899~1929)다. 그는 의회 연설에 나서 치안유지법을 강행하는 내각을 준엄히 경고하려 했으나 발언 기회를 얻지 못 했다. 가족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된 "이번엔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처럼 자신에게 찾아올 숙명을 알면서도 치안유지법 반대에 앞장서던 어느 날, 도쿄의 숙소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극우단체의 살인 테러였다. 그의 나이 39세. 미처 읽지 못한 그의 의회 연설 원고에는 '제국주의 전쟁 반대' '식민지 절대 해방'이라고 쓰여있었다.

아베 정권은 한국 사법부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구실로 무역 제재를 감행했다. 그 비인간적인 강제징용의 진실은 한 일본인의 사명감으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1933~2017)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징용됐다 고향으로 탈출하려는 조선인들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경찰에 모진 고문을 당해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는 운명처럼 강제징용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모두 57권의 단행본을 남겨 강제징용 연구의 초석을 쌓았다. 말년에는 거동조차 어려운 건강 상태에서도 펜을 테이프로 손가락에 고정시키고 끝까지 원고와 씨름했다. 극우세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한국과 일본은 물론 러시아와 중국에서 수집한 6000여점의 문서와 사진 사본은 한국 정부 국가기록원에 기증됐다. 그는 자신의 고향 후쿠오카에 생전 모은 강제징용 자료를 소장한 자료관을 만들면서 '아리랑 문고'라고 이름 붙였다. '아리랑'은 끌려온 조선인들이 지옥같은 갱도에서, 살인적인 노동현장에서 숨죽여 불렀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의 한 장면. 왼쪽이 작고한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더팩트 DB

목숨을 내놓고 한국인의 벗이 된 일본인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다. 1945년 천황의 항복 선언 후 치안유지법이 폐지될 때까지 이 법으로 처형되거나 고문을 당한 일본 열도 내 피해자만 7만 5000명에 이른다. 다수의 양심적 일본인들은 해방 후에도 일제의 만행을 성찰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지지해왔다.

아베 정권의 경제 보복 이후 반일 감정이 치솟는다. 그러나 우리의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가 아닌 '전쟁이냐 평화냐'가 문제다. 아베 정권의 이번 조치는 단순한 과거사 처리에서 쌓인 불만이나 선거 전략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에 이은 북일정상회담 등 북일 수교 코앞까지 갔던 2002년, 극우세력은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화해의 물줄기를 되돌렸다. 이 흐름에 올라 타 단박에 유력 정치인으로 입지를 굳힌 인물이 바로 아베 신조다. 그는 북한이 가하는 위협을 과장하고 혐오를 조장하며 일본의 '정상국가화'를 추진해왔다. 그가 말하는 정상국가는 결국 교전권 포기를 명시한 평화헌법 제9조 개헌과 군사대국, 패권국가화를 지향한다. 이런 아베 정권에게 한반도 평화 진전은 달갑지 않은 변화다.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냉전 질서 해체 후 새로운 적이 필요했듯이 아베는 열도를 패닉에 빠뜨릴 새로운 '고질라'를 찾아야 한다.

전쟁 또는 평화의 선택은 국적의 차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1961년 5.16 쿠데타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에게 한일수교 협조를 구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해 11월에는 도쿄를 방문해 직접 만났다. 기시의 전폭적 지지 아래 한국과 일본 정부는 1965년 문제의 뿌리가 된 수교협정을 체결했고 박 대통령은 1970년 6월 그에게 보답으로 '수교훈장광화장'을 수여했다. 바로 그 기시 전 수상은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 산업부 차관을 지낸 강제징용의 관리자이자 살아남은 A급 전범이며, 아베 총리의 외조부, 정치적 스승이다. 박정희 의장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뒤집기 위해 양승태 사법부와 논의해 재판을 6년간 지연시킨 것으로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 결과 드러났다. 한일협정의 주역들이 형성한 카르텔은 현해탄을 가로 질러 한일 양 영토에 걸쳐있으며 지금까지도 지속된다.

박정희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수상(오른쪽)이 1970년 4월 21일 청와대에서 접견하며 악수하고 있다./국가기록원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은 평화로운 국가보다 전쟁이 가능한 국가를 꿈꾸는 아베 정권의 폭주를 우려한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일본 시민과 지식인들은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3.1 독립선언은 대한 독립 뿐 아니라 일본이 동양평화의 지지자로서 다시 태어날 것을 충고한 목소리였다는 데 주목했다. 이 성명은 이같이 마무리된다.

"지금 우리는 조선민족의 이 위대한 설득의 소리를 듣고 동양평화를 위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일한, 일조의 상호이해, 상호부조의 길을 걸어야 할 때이다."

이제 반세기가 넘은 낡은 한일 연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시간이 왔다. 2010년 자민당 일당 독주 55년만에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간 나오토 총리는 여러 아쉬움 속에서도 일본의 강제 지배를 우회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간 바 있다. 암흑의 시대, 대한 독립과 동북아 평화를 위해 손잡았던 한국과 일본의 양심은 평화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한일 관계라는 '창대한 끝'을 향해야 한다.

leslie@tf.co.kr

원문 출처 [장우성의 B급칼럼] 일본의 양심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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